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무제 #6

볕 좋은 날, 개울가에 앉았습니다. 전선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던 비둘기들도 물가에 앉아 몸을 씻습니다. 참새처럼 작은 새들이 몸을 적시고 물을 터는 모습을 본 적은 있지만 비둘기가 몸을 씻는 처음 봅니다. 이미 몸을 씻고 난 비둘기들은 한 쪽에 모여 날개를 펼쳐 놓은 체 꾸벅꾸벅 졸며 볕을 쬐고 있습니다. 햇빛이 일렁이는 수면 위로 기름이 둥둥 떠다닙니다. 제 등 뒤로 지나는 사람들은 몸을 씻고 있는 비둘기를 향해 더럽다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. 다들 깨끗이 씻고 난 뒤의 개운함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. 가만, 저 비둘기들의 때는 어디서 묻은 것인가요? 비둘기가 씻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더럽다고 하면 비둘기는 무얼 더 할 수 있을까요?


무제 #23

누나들은 하루 묶고 가는 손님들을 위해 속옷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. 손님 대부분은 업소에 다녀온 걸 자랑하느냐고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고 했다. 그렇게 인기가 없어진 속옷은 내 몫이 됐다. 누나들이 준비한 팬티는 진한 녹색과 주황색 사각 트렁크 팬티였다. 나이대에 상관없이 누가 입어도, 누가 봐도 수상한 팬티였다. 나는 그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. 하도

무제 #22

타이머가 울려도 누나가 방에서 나오지 않으면 문 앞에 서서 누나의 이름을 낮은 목소리로 목에 힘을 주어 불러야 한다. 저번엔 평소처럼 누나라고 불렀다가 누나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. 그래서 손님들이 무서워하기나 하겠냐고. 나는 보통 처음 보는 사람들 대하는 자리에선 이때 연습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. 그래도 나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본

무제 #21

누나들은 종종 손님들이 두고 가는 물건들을 잘 가지고 있다가 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물건들은 내게 갖다 주었다. 대부분 남성용 시계 같은 액세사리였다. 세상에 이렇게 낯선 물건들이 또 있을까. 누나들 앞에선 한두 번 착용해보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누나들 앞에서 버리기 미안해서 한동안 책상에 올려두었다가 책상 정리를 할 때 한꺼번에 내다 버렸다. 그중엔 꽤 값이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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